이 글은 2015년에 그 동안 설악포럼에서 논의된 자신학화 논의 부분에 대해 권성찬 선교사가 정리한 글이다.
자신학화
1. 자신학화 논의의 배경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이 제대로 전해졌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의 하나는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정체성 (identity)을 갖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이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고 자신의 존재 의미와 자신이 속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아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열방을 향한 큰 그림을 이해하고 이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정체성을 돕는 선교 이론 및 선교 전략을 3자 원리라고 말한다. 영국의 헨리 벤과 미국의 루퍼스 앤더슨에 의해 각각 발전된 이 3자 원리는 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한 존 네비우스에 의해서 실천되고 발전되었다. 그리고 한국 선교 초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외국 선교사들이 바로 이 존 네비우스를 초청하여 선교의 3자 원리를 배우게 되고 한국 선교에 적용함으로써 한국 교회는 이 3자 원리가 적용되어 토착 교회가 성장한 좋은 사례가 되었다. 3자 (three self)란 자급 (self-supporting), 자치 (self-governing), 자전 (self-propagating)을 말한다.
이렇게 좋은 선교 원리 및 전략에 의해 큰 수혜를 입었으면서도 오늘날 한국 교회에 의해 이루어지는 타문화 선교는 3자 원리를 잘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금이라도 이러한 3자 원리를 선교에 잘 적용한다면 훨씬 건강한 선교가 이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악포럼의 논의가 3자 원리의 회복에 머물지 않고 자신학화라는 다소 생소한 데까지 나아간 데는 그 이유가 있다. 먼저 설악포럼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선교 사역보다는 선교의 좀 더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논의에 초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3자원리 자체보다 그것의 기초에 놓여 있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다. 선교의 3자 원리는 그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그 배경을 이루는 전제가 있다. 이러한 선교 원리가 개발되던 시기는 서구 교회가 선교를 주도하던 시대였다. 기독교의 중심도 서구였고 선교 역시 서구 기독교인들이 복음이 없는 비서구 지역으로 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좋은 선교 원리와 선한 의도와는 별도로 그 시대가 가진 신학적 그리고 선교적 전제는 서구적이었다. 서구적 신학과 선교학이란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이해와 그 적용이 서구의 문화와 관점에서 이해되고 적용 된다는 뜻이다. 서구가 기독교의 중심인 시절에 서구 신학은 곧 유일한 신학 (The Theology)으로 이해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틀 안에서 진행되는 선교에 있어 선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가장 큰 배려는 서구인들이 이해한 복음 혹은 그 복음을 정리한 신학을 새로운 상황에 잘 적용하면 되는 일이었다. 복음은 건드릴 필요가 없고 적용만 잘하면 된다는 것이 서구 교회의 생각이었다. 그런 전제에서는 자신학 (self-theology)이란 개념이 있을 수 없고 적용만 잘하면 된다는 의미에서 자급하고 자치하고 자전하는 3자의 개념이 가장 훌륭한 선교 원리로 이해된다.
오늘날 기독교의 판도가 변하고, 오랫동안 선교지로 인식되어 왔던 아프리카와 아시아, 태평양 그리고 남미에서 기독교가 부흥하고, 교회의 숫자 및 기독교인의 숫자, 심지어 선교사의 숫자까지 서구 보다는 비서구 지역 출신이 더 많아진 상황에서 자신학이라는 용어가 나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생각이라기 보다 그 동안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도 옷을 준 외부인에 대한 배려 혹은 그 외부인이 무섭거나 혹 거부했다가 받고 있는 도움이 끊어질까 두려운 나머지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았던 고통을 이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일지도 모른다. 좀 더 긍정적 관점으로 말한다면 기독교의 새로운 부흥을 위해 새로운 지역의 교회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앤드류 월스는 3-4세기에 성경적 전통이 헬라 및 로마 세계와 만나 풍성한 신학을 발전시킨 이래 이제 다시 한번 성경적 전통이 유서 깊은 아시아 및 아프리카 문화와 만나 새로운 신학의 발전이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곳곳에서 여전히 의존적인 모습을 보이는 비서구 기독 공동체의 원인은 3자의 부족이 아니다. 그래서 여러 비서구 지역의 지도자들이 그 이유를 조심스럽게 자신학의 부족으로 생각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가운데 있다. 단순히 외부에서 전해 받은 것을 잘 토착화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들이 현지 공동체가 스스로 하나님과 복음을 발견해 가는 과정을 돕기 보다 이미 자신이 결정지은 것을 잘 전달하려는 상황화 정도의 선교 신학을 가지고는 바른 역할을 하기 어렵다. 현재 일어나는 변화에 바르게 대응하기는커녕 오히려 의도하지 않게 현지 공동체의 성숙을 방해할 수도 있다. 따라서 선교에 있어 자신학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선교사의 중요한 역할이 현지 문화 공동체가 자신학화 해 나가는 과정을 돕는 것이라면 선교사는 자기 스스로 자신학화의 과정을 경험했거나 적어도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2013년 7차 설악포럼에서 한국 기독교의 초기 공동체를 통해 나타난 자신학화 과정을 살펴 보았다. 두 가지의 사례를 살펴 보았는데 하나는 18세기, 아직 개신교가 이 땅에 들어 오기 전 중국에 까지 와 있던 기독교 (천주교)가 조선에 들어 오게 된 과정을 살펴 보았다. 당시 유학의 틀을 가진 조선의 초기 천주교 공동체가 복음을 수용하는 모습을 자신학화라는 틀로 이해해 보고자 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 땅에서 초기 개신교가 정착하는 과정을 살펴보면서 새로운 복음이 어떻게 토착화 해 나갔는지를 보았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2014년 8차 포럼에서는 이슬람권에서의 자신학화 논의를 다루었다. 이 자신학화라는 주제는 아직도 많은 논의와 연구가 필요한 주제라고 생각되며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는 수준에서 이 문제를 살펴 보고자 한다.
2. 한국의 자신학화 사례들
2-1 유교적 자신학화
개신교에는 다소 생소한 한국 천주교의 형성 과정에서 일어난 자신학화는 이성배 신부 의 저서 “유교와 그리스도교”를 기본 교재로 하였다. 또한 이성배 신부를 방문하여 강의를 듣고 질의 응답을 통해 보충하였다.
이벽과 초기 천주교 공동체 (이하 8차 포럼 발제문 참조)
한국 천주교 공동체를 처음 시작한 사람은 광암 이벽 선생인데 천주교에서는 이 분을 성조(聖祖)라고 부른다. 이벽은 1754년에 태어나 30대 초반인 1785년 (혹은 1786년)에 죽음을 맞이 하였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 정약용 집안과 관계를 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정약용에게는 약전, 약종이라는 형들 외에도 약현이라는 제일 큰형이며 배다른 형님이 있는데 그 약현의 아내가 바로 이벽의 누나이다. 또한 정약현의 사위가 백서 사건으로 유명한 황사영이니 이벽에게는 조카 사위이다. 이렇듯 초대 신앙의 가문이며 순교의 가문인 정씨 집안의 사람들과 그와 관련된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 이벽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벽은 당시 중국을 통해 전해진 기독교 서적을 통해 복음을 접하고 자신의 깊은 유학적 틀을 통해 복음을 이해하였다. 이해에 그치지 않고 당대의 많은 유학자들에게 토론과 변증을 통해 복음의 영향을 끼쳤다. 조선 최초의 세례자이며 정약용의 매형인 이승훈에게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도록 권유한 이도 이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초기 천주교 공동체의 리더였고 초기 공동체의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 모임이 커지자 좀 더 큰 공간을 가진 중인 계급의 김범우 집으로 집회 장소를 옮겼는데 그곳에서 모임을 인도하던 중 발각이 되어 모두 잡혀가게 된다. 이를 을사년 (1785년)에 추조(형조)에 의해 발각 되었다 하여 을사추조적발사건이라 부른다. 비록 양반 가문에 속한 이벽, 이승훈, 정약용 등은 훈방 되었으나 중인 계급이며 집회 장소를 제공한 김범우는 끝내 고문과 귀양 끝에 첫 순교자가 되었고 후일 세워진 명동 성당은 바로 김범우의 집이 있던 명례방에 세워졌다. 이벽의 집안은 강직한 무인 집안이었는데 이 적발 사건으로 인해 이벽의 아버지는 아들이 서학을 따르는 것에 대해 단호하게 반대하게 되고 이벽은 결국 집 안에 감금 당한 채 죽음을 맞이 하게 된다. 이후 천주교는 당대의 정치 상황 및 교황청의 선교 정책의 변화와 맞물려 많은 박해를 당하게 된다.
이벽의 선교적 위치
한 문화가 그리스도께로 회심하는 과정을 앤드류 월스는 3가지의 단계로 설명한다. 첫 번째는 선교사 단계 (missionary stage)이다. 바울과 같은 선교사가 새로운 문화로 가서 그 문화 방식과 그 언어의 표현 방식으로 전달하는 단계이다. 하지만 이 외부인 선교사는 여전히 유대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기에 다른 문화로 깊이 들어가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겪지는 않는다. 두 번째 단계는 회심 단계 (convert stage)인데 내부자가 복음을 만나며 일어나는 단계이다. 저스틴의 경우 헬라 지성인으로 철학의 궁극적 목표인 신을 보는 것을 추구하였다. 그런데 헬라 철학에서 보지 못하는 신을 복음을 통해 만났고 성경의 내용을 헬라의 철학적 담론으로 담아내었다. 그가 겪은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였다. 기존 문화인 헬라 문화 안에서 가진 지적 정체성과 새롭게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어떻게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이에 대한 판단 기준으로 성경 말씀을 붙잡았으며 자신이 받은 헬라 유산을 성경 말씀으로 평가하고 교정하였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사도 요한이 사용한 로고스의 의미보다 더 확장된 의미 (이성 포함)의 로고스 개념이 나오게 되었다. 세 번째 단계는 재형성 단계 (refiguration stage)로서 오리겐과 같이 기독교 이전의 문화 유산을 물려 받았으나 동시에 기독교 신앙 안에서 자라난 세대를 말한다. 양쪽 문화 모두에 대해 긴장을 느끼지 않기에 또 다른 의미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겪지 않고 자신의 유산을 모두 기독교적으로 해석하는 단계이다.
이런 앤드류 월스의 설명을 빌어 이벽을 파악해 본다면 두 번째 단계인 회심 단계와 가장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저스틴은 헬라 철학 안에서 궁극적 목표에 도달할 수 없어 좌절하다가 그리스도가 곧 헬라 철학이 말하는 모든 존재의 근원인 원형 로고스 (The Logos, logos sperimatikos)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벽도 유교가 추구하던 궁극적 개념인 성(誠), 즉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을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에게서 발견하였다. 이벽이 자신의 유교적 유산과 그리스도 복음 안에서 새롭게 가진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 했을 것은 너무나 자명하며 그런 가운데 복음을 유교적으로 표현한 것은 참으로 높이 평가할 일이다. 따라서 이벽의 자신학화 논의는 복음에 대한 유교적 표현이 어떤 것이었는가에 대한 표피적 논의를 넘어 서 그렇게 유교적으로 복음이 표현될 때 발견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의 본질은 무엇이고 유교적 복음 이해가 기독교의 발전과 확장에 기여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자신학화는 단순히 상황화가 아니라 각 문화가 가진 관점으로 신학의 지평을 넓히고 깊게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벽의 유교적 그리스도 이해
공자 이전에는 인격적인 존재로서의 “하늘” 개념이 있었는데 정권을 뒤집는 권력자들이 자신의 뜻을 하늘의 뜻이라 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게 된다. 이에 공자는 인격적인 하늘보다 우선 눈에 보이는 사람 사이의 도리, 즉 “인”(仁)을 강조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 발전하여 주자학에 이르면 윤리적 완성을 목표로 하고 예법이 강조된다. 조선의 유학은 바로 이 주자학이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며 그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야 하는 절대자로서의 하늘대신 비인격적 유물론적 하늘을 발전시킨 것이 조선의 유학이다. 결국 공리공론에 빠지게 되고 과중한 부담을 주는 무의미한 예론(禮論)만 발전되었다. 이벽은 이들을 바리사이 (바리새) 무리들이라고 칭하며 그 음역된 바리사이(法利賽) 글자에 입구(口)자를 적어 넣어 풍자한다. 이벽은 주자학에 머물지 않고 본래의 유학을 깊이 연구함으로 하늘의 도리와 인간의 도리가 합일되는 성(誠)을 추구하게 된다. 성(誠)은 공자의 인(仁)보다 더 고차원적인 개념으로 공자 자신도 성(誠)을 소유한 인간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하였다. 성은 “평범한 인간생활의 성실하고 진실한 태도를 뜻하는 데서부터 멀리는 지극히 높고 고귀한 절대자 하느님의 본성과 그 속성까지 연결이 닿는 개념이다.”
유교의 핵심 개념인 성(誠)이라는 틀을 통해 기독교를 이해한 이벽의 기독교 본질 이해는 곧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이다. 복음은 새로운 문화로 넘어갈 때 비로소 본질이 드러난다는 몇몇 학자의 주장에 비추어 생각한다면 이벽이 유교적 틀에서 이해한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교의 핵심 개념인 성(誠)으로 이해한 것이다. 그가 기록한 성교요지에 그리스도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삼위 가운데 제2위이시고 인륜에 나시어 오륜에 머무시도다” (3장5-6). 그 그리스도는 말씀(言)의 완성(成)으로서 선재하신 그리스도 (High Christology)이자 동시에 단순히 세상에 오시었다는 성육신(Incarnation)의 개념을 넘어 오륜에 머무시는(Identification), 즉 완전한 인간의 길을 보여주시는 (Low Christology) 분으로 이해된다. 결국 이벽이 이해하는 기독교의 본질은 하늘 진리 혹은 하늘의 도리를 단순히 전해주는 자가 아니라 그 하늘 진리 혹은 도리 자체이신 하나님께서 그것이 인간의 도리로 구현되는 계시 자체요 계시의 완성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이해한 것이다. 그리하여 온전한 하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며 율법의 완성으로서의 그리스도를 이해하도록 만든다. 이제 오륜은 인간 노력으로서의 정성이 아니라 완전한 하늘의 도리가 인간의 세상에서 완성되는 성(誠)으로 이해되어 하나님 안에서의 윤리적 세상을 꿈꾸게 한다. 이는 한편으로는 가벼운 구원 이해로 삶의 진지함을 잃어버린 극단과 다른 한편으로 인간의 도리만을 강조하여 바리새적 종교주의에 빠진 극단을 모두 극복하는, 총체적이고 통합된 기독교 이해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를 성(誠)의 준거틀로 이해한 이 유교적 이해는 하늘의 도리와 인간의 도리를 이분법적으로 나눈 서구적 기독교의 한계를 넘어 통합적이고 더욱 진실한 기독교를 제시한다. 율법주의를 거부하면서 동시에 율법의 완성을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아버지와 함께 하시고 그를 보신 유일한 자이면서 동시에 완전한 인자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길을 이해하는데도 도움이 된다. 이 때에 성(誠)은 인간의 노력으로서의 정성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 혹은 하늘 진리의 구현으로서의 진실된 삶, 윤리적인 삶 등에 대해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한다. 극단적 구원주의에 식상한 오늘날 기독교가 선교를 포함한 모든 면에서 윤리의 가치를 재고하고 있는 이 때에 유교적 준거틀로 그리스도의 본질을 이해하고 발전시킬 가능성을 보여 준 이벽의 자신학화 과정은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준다.
2-2 초기 개신교의 토착화 (이하 7차 포럼 리뷰 인용)
이덕주 교수는 문제 의식을 한국 교회의 위기에서 출발한다. 그가 말하는 위기란 한국 교회 정체성의 위기이다. 그는 그에 대한 해답의 하나로 계2:1-4의 ‘첫 사랑’에 주목하였고 그 첫 사랑을 찾아 가는 과정으로서 1903년부터 1908년의 한국 초대교회의 부흥 기간에 주목하였다. 그리고 그 당시의 자료를 통해 해석보다는 사실(fact)에 주목하는 역사신학의 입장을 취하였다. 특히 기독교 대백과 사전 편찬 작업에서 한국 관련 자료들을 수집하는 책임을 맡아 다양한 자료들을 볼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 초대교회에서 이루어진 토착화 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덕주 교수에게 있어 토착이란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장과 성도와 목회자들의 믿음과 신앙 행위 속에 토착화되어 나타난 사실을 구별해 내는 일이고 그것을 해석하는 일이었다. 철저하게 나타난 사실을 통해 토착화를 찾아가려는 입장이다. 자료 중심의 토착화 발견은 다양하게 제시되었다. 최초의 한글성경인 ‘예수셩교누가복음젼’은 전체적으로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직 ‘예수’ 혹은 ‘하느님’이란 단어 뒤에만 띄어쓰기가 나타난다. 이는 왕이란 글자 뒤를 띄우는 우리 전통의 ‘대두법’이라는 쓰기 방식을 빌어 온 성경 기록의 토착화이다. 또한 한옥인 소래교회의 용마루 중앙에 십자가를 세웠는데 이는 전통한옥 용마루에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나뭇가지를 세우는 건축 양식에서 빌어 온 토착화이다. 그 외에도 통성기도, 일손보 (매일 예물을 드리는 것), 성미 (정성으로 드리는 쌀) 등 여러 가지 사실 관계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기독교가 한국 사회에서 토착화 되어 나타났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한석진, 길선주 목사를 비롯한 1세대 한국인 지도자들이 이러한 토착적 주체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서려는 노력을 기울여 왔음도 설명하였다. 한석진 목사는 선교사가 주는 돈을 거절하고 여러 교회를 선교부의 돈이 아닌 자신들 스스로의 돈으로 지었으며 조선예수장로교회라는 교단 이름을 조선예수교회로 바꾸어 하나의 교회를 만들자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한국교회 지도자만이 아니라 일부 외국 선교사들을 통해서도 나타났다. 평양 신학교에서 40년 이상 구약을 가르친 엥겔 선교사는 1904년 장로교, 감리교 선교사 모임에서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한국교회의 변화가 한국인들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선교사들이 나서기보다 참고 있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께서 한국의 관습을 바꾸어 서구와 같이 진정한 기독교인이면서도 여전히 동양적인 기독교 나라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주창하였다. 그는 서구 문명이 그 해로운 영향과 더불어 한국 교회에 손대지 않기 되기를 간구하였다. (May God grant that western civilization, with its baneful influences, will leave the Korean church untouched!) 또한 피도수 (Victor W. Peters) 선교사는 한국인 여자와 결혼한 유일한 남자 선교사인데 이용도 목사와도 친분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김화읍 교회를 한옥으로 건축하였다. 그리고 문의 형태, 단청, 강단의 옥좌 형태 등 내부의 모양을 왕궁에서 볼 수 있는 모양으로 함으로써 예배당을 왕이 거하시는 곳으로 상징화하는 토착화를 보여 주었다. 이외에도 다양한 그림과 자료를 통해 한국교회 내에 토착의 형태로 표현된 복음의 여러 사실들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실제 자료를 통한 분석은 자칫 모든 토착 형태가 복음적인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그에 대한 답은 대부흥 때 성도들이 고백한 회개의 내용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의 대부흥 때 회개한 내용은 일반 사회에서 죄로 인식하는 것만이 아니라 유교적 전통에서 죄로 인식하지 않던 축첩, 주초 등까지 고백했는데 이는 토착적 복음 이해가 복음적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덕주 교수는 자신의 사관을 한국 교회를 보는 여러 가지 사관 중 토착 사관으로 소개한다. 선교사의 입장에서 해석하는 선교사관 (백낙준), 민족교회의 입장에서 보는 민족사관 (민경배, 엘리트가 주역이 된다.) 그리고 민중이 주인이 되는 민중교회사관 (주재용) 등이 있는데 그것과 구별하여 토착교회 입장에서 보는 토착 사관이라는 것이다. 이 토착 교회 사관은 믿음의 요소를 복음과 교회와 민족 (선교학에서는 주로 문화로 이해)이라는 세 가지의 요소로 보고 이 세 가지가 만나는 복음적이고 민족적이며 토착적인 신앙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복음과 교회만 만나 소위 복음적 신앙을 형성하더라도 거기에는 민족과는 상관 없는 요소들이 있으며, 복음과 민족만 만나 소위 토착적 신앙을 형성하면 그것은 교회의 전통과는 상관없는 신앙이 형성될 수 있고 또 민족과 교회만 만나면 역시 토착적인 신앙은 형성되지만 복음과는 거리가 먼 신앙이 형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덕주 교수는 사변적이고 인위적으로 들릴 수 있는 자신학화 보다는 토착, 그리고 외부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토착화가 아니라 복음의 수용 과정에서 실제로 나타나는 토착의 사실을 통해 해석하는 토착 신학을 강조하였다.
이렇게 한국에 들어 온 개신교 초기에 여러 가지 토착화 현상을 설명할 만한 많은 사실들과 사람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한국 교회를 평가할 때 거기서부터 더욱 발전된 토착화 된 교회라 말하기 어렵고 게다가 토착적인 신학을 발전시켜 왔다고 말하기는 더욱 어렵다. 그렇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그 원인에 대해서는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토론에서는 그 다음 세대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서양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와 소위 신학자 1세대를 형성하면서 신학교에서 자신학화 과정을 개척해 나가기 보다는 그 서구 신학을 그대로 가르치는 일들이 반복되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길선주 목사의 주장은 자신학화 논의를 하는 오늘날에게 여전히 도전이 된다. “교회 자립은, 경제적 문제이기 전에, 한국 사람으로서 기독교인이 되어 새로운 민족 문화의 상징으로서 명실공히 한국인의 교회가 되는 데서 이루어진다… 시대성을 띠어야 한다고 해서 외래 문물에 무비판적으로 휩쓸릴 것이 아니라 민족 얼이 담긴 고유의 문화를 전승 발전시켜 가면서 정신면에서나 외적인 면에서 교회의 권위와 지도적 지위를 보유해야 한다.”
3. 이슬람에서의 자신학화 모색
2013년 한국 초기 기독 공동체 (천주교와 개신교)에서의 자신학화 논의를 기초로 하여 2014년에는 이슬람에서의 자신학화 가능성을 살펴 보고자 하였다. 한스 큉의 “이슬람”을 교재로 하고 이와 관련하여 김병훈 교수 의 발제 및 토의가 있었다. 한스 큉의 요지는 평화라는 관점에서 종교간의 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리고 그 대화의 기독교적 출발점은 이슬람이 받아 들이기 어려운 헬라적 기독론 대신 그 이전의 유대적 기독론이 되어야 함을 증명하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유대적 기독론은 이슬람의 신론 및 예수 이해와 대화의 가능성이 있고 심지어 헬라적 기독교에서 사라진 유대적 기독론이 오히려 이슬람 안에 보존된 긍정적 측면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주장을 기초로 이슬람의 자신학화 논의를 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그 자신학화는 어떠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논의 하고자 하였다.
김병훈 교수의 발제
김병훈 교수는 이러한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화에 대해 한스 큉의 주장과 미로슬라브 볼프의 주장을 비교하여 다루었다. 큉과 볼프의 차이는 이슬람과의 대화에 있어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어떻게 보는가에 대한 차이이다. 큉은 이슬람이 용납하기 어려운 헬라적 삼위일체를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유대적 그리스도 이해로 한 발 물러나고 이슬람 역시 선지자 예수의 독특성을 좀 더 열린 마음으로 대할 경우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볼프는 삼위일체에 대한 양보가 아니라 이슬람이 오해하는 삼위일체(삼신론)를 온전하고 바르게 설명한다면 대화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볼프는 삼위일체가 세 개의 신적 본질(three divine essences)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실체적 단일성(one substantial unity)이기 때문에 이슬람의 단일신론과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김병훈 교수는 위의 설명을 토대로 자신의 평가를 설명하였다. 우선 큉의 주장은 두 가지 이유로 받아 들이기 어렵다고 하였다. 먼저 4세기 이전에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의 양자론적 주장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기독론을 바르게 대변한다고 보기 어려우며 둘째로 그 초기 유대 기독교인들의 주장이 최종적으로 정통 교리가 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성경이 지지하는 것도 아니고 그들보다 앞선 유대인 사도들의 주장과 일치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병훈 교수는 볼프의 주장에 대해서도 비록 교리를 해치지 않고 바르게 설명한다는 면에서 큉의 주장보다는 적절하지만 결국 예수의 신성 문제가 걸리게 됨으로 이 역시 지지하기 힘들다고 하였다.
발제 후 토론
발제 이후 있었던 논의에서도 이러한 기독론의 토의로 인하여 본래 나아가려 했던 이슬람의 자신학화 논의가 원활하게 진행되지는 못하였다. 이슬람의 자신학화 논의의 발전을 위해 선결되어야 할 몇 가지 과제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유대적 그리스도 이해 이후에 나온 헬라적 그리스도 이해를 벗어내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헬라적 그리스도 이해를 벗어내는 것이 정당하다면 유대적 그리스도 이해가 유대인 제자들의 이해와 같은가?
만일 그 둘이 같지 않다면 유대적 그리스도 이해가 유대인 제자들의 이해보다 더 선재한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가?
유대인 제자들의 그리스도 이해는 무엇인가?
성경을 통해 오늘 우리가 이해하는 신론과 기독론은 무엇인가?
큉의 주장 (기독론)에 대한 동의와 관계 없이 이 틀을 이슬람 자신학화 논의에 사용할 수 있는가?
사용한다면 어느 범위 내에서 할 수 있으며 예수의 신성 문제와는 어떻게 관련되는가?
다양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슬람의 자신학화 논의에서 보여 준 한계는 기독론에 대한 입장 차이였다. 그리고 그 입장 차이란 헬라적 기독론을 기준으로 한 입장 차이였다. 이것은 무슬림이었던 적이 없는 외부인들 혹은 기존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처럼 보인다. 자신학화는 수용 문화의 준거틀을 통해 복음의 본질을 보게 하는 것을 포함하는데 다른 철학이나 종교에서는 그들이 가진 준거틀을 통해 복음의 본질, 특히 그리스도를 보게 할 때 현재 기독교가 보편적으로 이해하는 본질 및 그리스도 자체에 대한 변경이나 손상이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슬람의 자신학화의 경우는 그 틀 자체가 사용하는 단어 및 개념이 기독교와 표면적으로든 의미적으로든 공유 부분이 많기 때문에 단순하지 않다. 같은 뿌리의 다른 해석인지, 아니면 사용하는 용어는 같지만 전혀 다른 인식론인지, 그래서 이슬람이 주장하는 그리스도 이해 등 핵심적인 개념을 자신학화의 준거틀로 사용하는 것이 어느 정도 범위에서 가능한지에 대해 심층적인 논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슬람의 자신학화 논의는 이런 면에서 과제로 남겨 두게 되었다.
유수프 로니의 자신학화
2015년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설악포럼 위원회 모임 중 방문했던 GKA (아브라함 장막 교회)의 신학은 다른 각도에서 이슬람의 자신학화의 한 사례를 제공한다. 무슬림에서 회심한 사람들이 모이는 교회라는 면에서 외부인들이 만든 내부자가 아니라 내부인 스스로 복음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자신학화이다. 다음은 GKA가 설명해 준 그들의 신학을 정리한 것이다.
각 종교는 자신들이 말하는 신(하나님)이 있다. 그리고 각 종교의 신은 인간에게 나름의 계시를 주었다. 먼저 이슬람의 신과 유대교의 신은 인간에게 계시를 주었다. 하지만 인간이 이 계시를 바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계시를 인간에게 설명해 줄 매개체로 선지자를 세워서 계시를 설명한다. 헬라인들의 신은 인간에게 철학을 주었고 그 철학을 인간에게 설명해 주는 매개체는 철학자이다. 기독교의 경우는 하나님의 계시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인간 가운데 거하시니 그가 곧 그리스도이다. 히브리서는 이것을 이렇게 말씀한다.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그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1:1-2)
이 GKA의 설명 중 두 가지를 주목하게 되었다. 하나는 예수가 하나님이다라고 말하지 않는 것과 다른 하나는 성경 원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이다. 먼저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삼위일체를 양보하느냐 안 하느냐가 자신학화의 논의의 핵심 주제가 되었던 외부자의 자신학화 논의와 달리 이 무슬림 배경을 가진 교회는 그 사이에서 아무런 갈등없이 이 진리를 이해하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이라는 사실을 그대로 설명한다. 다만 예수가 하나님 (알라)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삼위일체 신앙을 가진 현 기독교의 입장에서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두 가지를 혼용하여 사용한다. 그것은 때로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기도 하고 성부, 성자, 성령을 포함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가리키는 단어로 사용하기도 한다. 예수가 하나님이다라고 할 때 그 하나님은 후자의 경우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이다라는 말은 현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아무런 저항없이 이해된다. GKA가 그런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복음의 수용자인 무슬림의 경우 하나님 (알라)이라는 단어는 한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즉,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용어로만 사용되지 하나님이란 용어로 세 분을 동시에 표현하는 용어로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가 하나님 (알라)이다 라는 말은 예수가 성부 하나님이다라는 말로 들려진다. 현 기독교 내에서도 에수가 곧 성부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GKA 교회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성경에 표현되는 그대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에게서 나온 말씀, 심지어 하나님과 같은 본질 등을 거부감 없이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이슬람의 자신학화 논의에서 헬라적 기독론을 기반으로 옳고 그름을 논하는 것과 상관없이 제 3의 길을 이슬람에서 회심한 공동체가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두 번째로 원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일종의 토착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토착이라고 말할 때 그들 자신의 언어 혹은 문화를 연상하게 된다. 무슬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종교적 문화가 절대적 계시인 코란이고 코란은 번역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다른 언어로 번역된 코란을 본래의 코란과 동일한 말씀으로 보지 않는다) 본래 계시된 아랍어 원어 코란만을 본래 계시로 보기 때문에 ‘원어’라는 준거틀이 그들에게 존재한다. 따라서 이들에게 ‘원어’는 종교적 관점에서 토착이라는 준거틀을 제공한다. 이들에게 중요한 단어들을 성경의 원어로 소개하는 것은 복음의 수용을 높게 만든다. GKA를 통해 이슬람 자신학화에 있어 내용적인 사례와 방법적인 사례를 동시에 볼 수 있었고 앞으로의 이슬람 자신학화 논의가 이런 내부자들에 의해서 발전된 것을 기대할 수 있다.
4. 앞으로의 과제
모든 용어가 그러하듯 자신학화 역시 누가 어느 상황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는 달라질 수 있다. 첫째로는 지역 신학으로서의 자신학화이다. 기독교의 지형이 급속히 변함에 따라 다양한 문화를 가진 각 나라의 교회들이 점차 자신의 독특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런 각자의 모습을 가지고 전 세계 기독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학화란 각 문화 속(Context)에서 말씀(Text)을 읽어내고 그 읽어낸 말씀으로 다시 자신들의 독특한 상황 (context)에 대한 답을 찾는다는 면이 있다. 그것은 각 문화가 발견하는 지역 신학 (A Theology)의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이 때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 대로 그 지역 신학들이 상호간 대화를 통해 보편적인 신학 (The Theology or Meta Theology)을 함께 형성하고 확대해 나갈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의 자신학화 논의는 한국 신학이라는 관점에서 진행될 것이다.
두 번째로 타문화권 선교라는 관점에서 자신학화 논의는 3자 원리와 복음의 상황화에서 한 발 더 나가 현지 공동체 스스로가 하나님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자신들의 준거틀로 말씀을 이해하는데 까지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선교사라는 외부자가 무엇을 이해하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의 논의를 포함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자신학화와 한국 교회의 선교는 사실 불가분의 관계이다. “기독교가 숫자적으로는 남쪽 교회로 옮겨 졌지만 문화적으로는 아직 아니라”고 말한 존슨 (2010, p.165)의 지적은 좀 더 깊게 말하자면 신학적으로는 아직 아니다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선교가 선교지의 자신학화를 돕는데 까지 나아가려면 한국 교회의 자신학화는 선결 과제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고서 제자 삼으라는 말씀을 이룰 수 없는 스스로 자신학화 과정을 거치지 않고 선교지의 자신학화 과정을 돕기 어렵기 깨문이다. 물론 자신학화의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자신학화를 저절로 도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구 신학을 서구 교회의 자신학이라고 본다면 그런 자신학화를 거친 교회라 하더라도 다른 문화권이 동일하게 그런 자신학의 과정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 인식이 없다면 자신의 신학을 이식하게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자신학화 과정과 다른 문화권의 자신학화 가능성 둘 다를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교회가 비록 늦었지만 스스로의 자신학화 과정을 시작해야 하며 동시에 한국 교회의 선교가 선교지의 자신학화에 대한 안목을 가져야 한다.
이 자신학화 논의가 선교에 있어 급선무인 까닭은 선교지의 교회들이 이렇게 스스로 말씀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하나님의 선교에 주체적으로 참여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지 못하고 사회학적이나 문화적, 더 나아가 신학적으로 외부에 의존하는 교회 공동체로 남아 있는 한 바른 선교는 요원하기 때문이다. 의존적인 현지 교회 공동체를 바르게 세우는 것을 포기하고 외부인 (선교사) 들이 소위 미전도 종족 지역에서 선교 실행자가 되어 사역하는 것이 단기적으로는 선교에 가속을 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옳지 않다는 것이 여러 지역에서 이미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자신학화 과정에 선교사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고 그 역할을 위해 필요한 내용 (훈련)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이 선교와 자신학화 논의에 포함되어야 한다. 젠킨스는 (2006, p 193) “성경을 지속적으로 신선한 관점을 통해 읽는 것이 우리에게 아직 거기에 남아 발견되어야 할 깊은 것들이 있음을 상기 시켜 준다”고 말한다. 이는 다양한 문화 공동체가 본문을 충실히 읽어 냄으로 전 세계 공동체가 얻을 유익에 대해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 자신학화의 유익이다. 이러한 논의가 더욱 활발하게 일어나 선교지에서 신학적으로도 건강한 공동체가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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