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자신학화 포럼/포럼 참가자 소회

제3차 포럼 참가자 소회

자화지기 2022. 11. 11. 22:58

성찰을 주요 가치로 가지고 있는 자신학화 포럼에서 이번 포럼을 참가한 분들의 소회를 나눕니다.


지난 나흘간 진행된 이 포럼에 얼떨결에 초대받아 기쁘게 참여하면서 제가 느낀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창산 목사)
1. 이 자신학화 포럼이 1차적으로 추구하는 바가 한국교회의 바람직한 (상황화 및) 자신학화의 길을 찾아 나서려는 거창한 스케일의 목적을 이루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물론, 그것을 지향해야겠고 또 그런 방향을 가지고 계시긴 하겠지만) 이곳에 모인 우리 각자의 신학적 자기 객관화 및 유연성을 1차 목표로 하고 있는 모임 같다는 분위기 파악이 (사흘째 되던 어제 저녁에야) 되었다는 점.
2. “나 좀 그만 때려 X발...”, “나는 니 안에 있다.”, “그거 내가 했다.”, (남편 선교사님이 죽음의 위기를 넘기셨을 때, 보호자로서의 소감을 말해달라는 요청을 받으신 그 아내 선교사님이 하신 말씀이었던) “아직 제게 정리가 안 되었어요...” 그리고 나의 바로 앞에서 두 분이 손을 마주잡고 식당에 들어가시던 그 눈물겹도록 다정한 뒷모습 등, 나의 타자요 또한 동역자들이신 여러 선생님들이 내게 주신 인격적인 도전과 감동들.
3. 계속 공부하리라 다짐: 기독교계의 주된 세 신학 전통(성직자 중심의 가톨릭, 신경과 교부 중심의 정교회, 성경 중심의 개신교)이 시대적, 문화적 요청에 제대로 응답하는 과정인 자신학화적 당위에 호응하되 그와 동시에 주류 세속문화나 가변적인 시대정신을 지난 역사 속에서 수천 년간 검증된 성경이나 신경 위에 함부로 올려놓을 때의 무질서한 결과 역시 비판적으로 내다보면서 결국 무엇이, 또 어떤 전략과 포지셔닝과 태도가 이 세상의 사람들을 더 제대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리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더 제대로 많이 해보리라 다짐함.
4. 김병년 목사님의 메시지는 아침경건회의 느낌보다는 저녁부흥회였고 또 어떤 점에선 이 포럼의 메인강좌 같기도 했다. 많이 울었다.
5. 앞으로의 기대:
1) 신약 복음서의 저자들이나 서신서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이나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어떻게 자신학화 했는지와 같은 무난한 이슈들뿐 아니라
2) 어제 오후 권성찬 선교사님의 강의안 각주 6번에서 언급된 월터 브루그만의 최신작이 다루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동성애자에 대한 태도를 비롯하여 3) 여성안수, 4) 만인구원설, 5) 연옥이나 지옥은 과연 존재하는가 등과 같은 민감한 이슈들도 (이 포럼의 역량 및 참가자들의 상호 신뢰성이 무르익었을 때에) 한 번 다루어보시길 기대한다.

 

제3차 자신학화 포럼에 참가한 소회 (최욥 선교사)
이번 자신학화 포럼에 참석하면서 경험과 통찰이 가득한 선배님들을 만나뵙고 그분들을 통해서 배우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선배님들은 제가 직면한 난제들을 높고 깊은 시야각으로 새롭게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저는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이 사유의 깊이는 어디서 오는가?’ 이번 포럼을 통해서 깊은 사유의 토양은 “본질에 바탕을 둔 지속적인 성찰” 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 미국, 아프리카의 발제자들이 함께 각자 연구한 내용을 나누는 시간은 곽계일 교수님의 말처럼 3개 대륙의 사조가 출렁이며 서로 만나는 지중해를 연상시켰습니다. 케네스 베일리가 [지중해의 눈으로 본 바울] 에서 유대 문학인 성경이 지중해 코스모폴리탄 기독교를 형성한 과정을 설명했듯이 기독교는 처음부터 복음이라는 상수가 상황이라는 변수 속에서 끝없이 번역되는 자신학화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어온 것입니다. 
용질은 언제나 자신을 녹여낼 용매를 필요로 하듯이 오늘날에도 복음은 시대를 살아가는 해석학적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몸을 이룬 공동체는 여러 타자들 속에서 오늘도 씨름을 합니다. 때로는 과거시제에 무릎꿇은 표준명제로 백문일답 하고 싶지만 우리와 “영원한 현재”를 사시는 임마누엘은 오래되었지만 영원히 새로운 화두를 던지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온고이지신, 지평의 융합, 교차문화적 접근, 대립되는 것의 복합, 다맥락적 사고는 자신학화를 위한 유용한 도구들입니다. 그러나 자신학화가 자기중심적 아전인수로 가지 않도록 개혁가들이 만든 세상조차 개혁하고 싶어했던 아나벱티스트의 레디컬한 제자도를 기억해야 함을 배웠습니다. 회심은 과거에 완성된 단회적 사건(혹은 그 경험)이 아니라 지속적인 메타노이아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추구를 하는 무리들은 대개 변방성을 갖게 됩니다. 주님의 수식어가 예루살렘 예수가 아닌 나사렛 예수라는 것은 하나님의 선교에 나타난 비하와 내어주심, 그리고 변혁의 능력을 잘 드러냅니다. 캘수스가 무시했던 변방의 공동체가 하나님 나라의 이콘이 되었을 때 제국을 전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기억합니다. 
자신학화를 통해서 복음을 재발견한 했던 변방의 무리들은 언제나 낡은 부대를 터뜨리고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라고 해도 그가 중심에 들어가서 권력을 사유화하고 백성들을 억울하게 할 때 하나님은 나단을 통하여 경고하셨고 결국 예레미야를 통해서 다윗왕조를 뽑고 솔로몬 성전을 파괴하셨습니다. 이 지점은 저에게 자신학화의 목적은 나 자신이 바르게 주님을 따르기 위한 것임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길을 함께 나누며 갈 수 있는 선배와 동지들을 만나서 기뻤습니다. 다음에는 성공회를 다룬다니 더욱 기대가 됩니다. 틴델 하우스에서 고교회, 광교회, 그리고 저교회가 함께 만나서 대화 한다는 그 유산이 정치고백으로 분열된 한국 기독교가 신앙고백으로 다시 얼굴을 마주대하게 되는 건강한 자신학의 물꼬를 열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자격이 안되는 자를 귀한 모임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한 소회들을 올려 주셔서 읽으면서 또 마음이 훈훈합니다.^^ 저도 지난 wrap up 시간 말씀드린 내용을 정리해 봤습니다.(서한길 선교사)
이번 3차 자신학화 포럼 여정에서 김병년목사님의 아침 말씀을 통해서는 제 삶의 “태도”를 돌아보는 계기였고, 그 이후 포럼 발제 시간에는 앞으로 사역 현장에서 반추하며 적용하고 싶은 다양한 자신학화적 배움이 있었습니다.
1.   아침 말씀: 첫째 날, 현실을 움켜 쥐고 있어야만 하는 영성/둘째 날, 소명을 발견한 게 너무 좋아서 제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제 능력이나 노력 때문에 소명을 주신 게 아닌데, 주신 분의 마음과 은혜를 잊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소명은 “능동적인 수동”임을 알았습니다/셋째 날, 임마누엘의 하나님, 특히 두려움과 고난 가운데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다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2.   타자: 이번 포럼에서 가장 집중했던 단어는 “타자”(Topic 2, Topic 4)입니다. 이 타자와 “변방성”(Topic-3)를 함께 연결 보면서, 재 세례파의 개혁이 갖는 자신학화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사역 현장에서 상황화 사역이나 상황화 신학을 진행할 때, 지금까지는 “성경, 상황, 전통”이 주였다면, 앞으로는 여기에 내 생각과 상황에 배타적인 “타자”와 “변방성” 개념을 함께 더해서 자신학화적인 고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3.   하나님의 마음을 살아 내는 자신학화: 자신학화와 본질(Topic -5)과 바울의 이신칭의(Topic-6)에서는 복음서와 서신서들에 대해서 상황화 신학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넘어 자신학화적 결과라는 이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Topic-6) 발제의 마무리에서 김홍주 목사님이 바울의 자신학화적 산물인 칭의교리를, 복음은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무슬림이라는 정체성으로 살아 갈 수밖에 없는 무슬림 형제들에게 적용하는 지점에서는, 같은 고민을 가진 자로서 깊은 공감을 하면서, 바울이 느꼈을 자신학화의 고민을 조금이나마 공감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동시에, 어디에서 드리는 예배가 맞느냐고 묻는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의 정체성을 뿌리 뽑지 않으면서도 정확한 복음의 진리와 함께 “아버지의 마음”을 전하시는 것으로 대신 답하시는 예수님을 연상해 보면서, 결국 오늘 내가 걸어가야 할 선교의 방향은 우선 나 스스로가 (마지막날 찬양으로 깊은 감동을 주신 Brown Worship의 마지막 찬양 가사처럼) “하나님의 마음을 살아내는 자신학화적인 삶”을 이뤄가고, 동시에 선교 현지인들의 자신학화적 삶을 돕는 일은 아닐지 생각해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내 언어로 그분의 마음(계시)을 해석 할 수 있도록 주신 이 큰 자신학화의 은혜가 오늘 내가 만나는 현장의 현지인들에게도 동일하다는 것을 되새겨 봅니다.
귀한 가르침을 주시고 섬겨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벌써 하루가 지났습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잊기 전에 저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한종석 선교사)
작년에 이어 두번째로 참석하게 된 포럼은 작년과 마찬가지로  많은 성찰과 질문을 하도록 한 모임이었습니다.
재세례파(Anabaptist)들의 개혁에 대한 열정과 희생 그리고 변방성에 관한 발제는 나에게 지속적으로 변방의 의미에 대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마도 내가 사역하는 나라의 기독교인들이 그 나라에서 사회, 종교, 경제적인 변방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저에게 투영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극심한  변방은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버림받는 고통을 당하시면서 까지 인간을 구원하시기위해 죽으심으로 스스로 변방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 분을 전하겠다고 그리고 그분을 닮는 삶을 살겠노라고 선교사로 살아가는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선교지에서 변방을 향하는 것을 넘어 변방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애씀과 현지인이 아닌 외부인으로써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중심성이 주는 긴장안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하는 질문을 다시 한번 하게 되는 그리고 답을 찾기 위해 애쓰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또한 자신학화는 매일의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가는 것에서 시작된다는 지난 포럼에서의 배움이 이 번 포럼에서 아침 묵상과 발제와 선배님들의 통찰을 통해서 더욱 가슴에 새겨지게 되었습니다. 포럼이 시작되기 열흘전 쯤에 겪은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머리로만 이해되었던 것을 마음으로 그리고 삶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공생애 3년만이 아닌 30년의 이 땅에서의 삶을 치열하게 사셨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일상을 주님과 함께 하지 못하는 나의 자신학화의 여정은 또 다른 공허한 외침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한 자신학화의 여정은 고립과 자기확신을 공고하게 하기 위한 길이 아닌 끝임없는 자기 성찰과 대화의 여정임을 배웠습니다. 자신의 자리에서  치열한 고민과 성찰을 통해서 얻은 자신학화의 결과도 타자와의 그리고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계속해서 나에게 물으시는 주님과의 지속적인 대화와 성찰이 없으면 고립화와 본질을 잃어 버린 정형화의 길을 가게 될 수 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내년 포럼에 참여하게 될지 알지 못하나 다음 포럼이 더욱 기대가 되게 하는 모임이어서 더욱 감사했습니다.
하루 하루의 일상을 다시 살아가게 허락하신 주님의 은헤에 감사드리며 부족한 자를 초대해주시고 풍성한 기쁨과 아픔의 나눔, 그리고 배움과 성찰의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도 보탭니다.(권성찬 선교사)

제가 공부한 선교적 성경읽기의 경우도 그것이 대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에 대한 큰 그림을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것을 너무 정확하게 정의하려고 덤비면 정의가 되는 순간부터 축소와 왜곡의 길을 걷게 됩니다. 

자신학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자신학화가 대충 뭘 하려는지 정도로 이해하고 그 큰 강물에 계속 물을 보태려는 마음을 먹어야지 그걸 명확하게 정의하려고 하면 오히려 길을 잃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이번 자신학화 포럼을 통해 제게는 자신학화가 뭘 하려하는 건지 좀 더 명확해 졌고 또 풍성해 졌습니다. 명확해 졌다는 이야기는 방향에 관한 이야기이고 풍성해 졌다는 것은 그 강물에 보태진 물이 많아졌다는 말입니다.

4번째 self로서 자신학화를 말한 폴 히버트의 단순한 질문은 '신생교회들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권리와 능력이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이 늘 출발점과 목적지에 대한 이정표를 보여주어 길을 잃지 않도록 해 줍니다. 그런데 이번 포럼에서 같은 방향이지만 질문을 좀 바꾸게 되었습니다. 자신학화의 방향이란 '성경이 아니라 성경이 가리키고 있는 예수를 주체적으로 읽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그 예수를 읽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충만함을 우리에게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는다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음을 시작으로 그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시는 성삼위 하나님을 더욱 깊이 이해하며 닮아가며 그 안에 거하는 일입니다. 재세례파가 교리를 넘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일상에서 드러내는데 까지 나아가려 했다는 사실에서 그 동안 그토록 진리처럼 여겨왔던 개혁자들의 '오직 성경'(sola scriptura)도 당시 상황에서 '성경'만을 향한 진실하고 지속적인 성찰과 실천이었다기 보다는 가톨릭이라는 '타자'에 대한 반동에 좀 더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주님의 말씀이 성경문자주의(biblicism)로 전락한다면 칼 바르트의 지적처럼 '종이 교황'(paper Pope)을 만드는 일이고 주님께서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하신대로 '영생을 얻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면서도 성경이 가리키는 예수에게로 가지 않는'(요5:39-40 참조) 어처구니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를 주체적으로 알아가며 그러기 위해 성경과 타자와 환경과 역사와 존재와..... 앞으로도 계속 그 물을 더욱 풍성케하는 다양한 성찰이 지속되기를 소망합니다. 가장 좋았던 것은 좋은 사람들과 함께 한 시간이었습니다. 곧 이창순 목사님께서 쏘신다는 수제버거로 만나겠습니다. 콜라는 각자 부담이라니 참고하시고요^^ 벌써 그립습니다. 샬롬.

 

자신학화...(박대영 목사)

나만의 신앙양심과 존재방식과 사유언어와 삶의 문법과 메타내러티브를 형성해가는 과정이다.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 근거하여(근본) 나 자신의 세계관과 욕망에 대해 상고하고 묵상하여(묵상) 내 존재를 완성해가는 여정이다. 이를 위해서 해체와 재정의, 회심과 리셋의 과정을 거친다. 또한 열린 마음으로 복음이 보편성, 포괄성, 포용성을 추구해 나가기 위해 자신을 상대화하고 수용적인 태도를 갖는다. 더 나아가 실존의 영역을 변화시키고 인격이 되고 존재 안에 문화를 형성해간다. 나에 대한 해석을 위해 내가 살아온 시대와 살고 있는 시대의 토양(사람, 환경, 물리적, 인문적)과 내가 들어온 복음, 영향을 준 신학을 고려한다.

-세상과의 관계에서

또한 이 시대의 질문과 도전과 공세에 맞서 하나님 나라 세계관에 비추어 대답하고(만남) 대면하고(개화) 대결하는(저항) 과정에서 형성되며, 그들을 사랑하고 섬기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려는 의도를 갖고 그들에게 경청하고 관찰하고 주의를 기울이는 견문(見聞)의 태도에서 형성된다.

-자신학화와 선교

선교는 이 자신학화를 통해서 세상에 대해, 세상을 향해, 세상을 위하여 그들을 복음의 언어로 진단하고 초문화적 복음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해주고 그들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도록 돕는 상황화, 토착화 작업이며,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는 일이다.

-관계

그렇게 자신학화는 관계 형성의 과정이다. 관계 형성을 위해 내가 성육화하는 과정이며(자기중심주적 태도를 피해), 탈신화화하는 과정이며(혼합주의적 태도를 피해), 역사화하는 과정이며(가현주의적 태도를 피해), 변방화하는 과정이다(제국주의적 태도를 피해).

-대화

자신학화의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복음에 대한 지속적이며 새로운 이해이며, 공동체 안에서의 협력과 지지와 도전과 검증이며, 자기 자신에 대한 혁신이다. 이 공동체 안에는 동시대의 교회와의 대화뿐만 아니라 이전 시대의 교회의 유산과의 대화도 포함한다. ‘의 속성과 의 속성 모두를 담지한 채 내 것(복음, )을 부여잡은 채 타인에 대한 무지를 전제하면서

성령께서 섞일 수 있도록() 맡기는 일이다.

-존재와 실천

그것은 예수화 과정이고, 성령의 사람이 되는 일이며, 성부의 창조의 수종자가 되는 일이다.

결국 자신학화는 존재화 과정이며, 자신의 사유의 방식을 성찰하여 시대 및 복음과 소통할 수 있는 논리를 형성하는 과정이며, 그것을 통해 실천적 적용을 통해 하나님 나라 실현에 참여하는 일이다.

-관용과 보편성

다원주의 사회에서 배제와 배타로 나아가지 않고 타자를 인정하는 똘레랑스의 태도로 중심을 잃지 않으면서 보편성과 포괄성을 추구하는 길에 대해 고민한다. 보편신학이나 메타신학을 특정하지 말고 끊임없는 신학화(그리스도에대한 정의)의 여정의 결과물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형성해나가야 한다.

-본질과 형식

필연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에서 자신학화는 지켜야 할 본질과 본질에 대한 성찰과 본질의 심화의 과정을 지속적으로 겪으면서 문화에 적실한 옷을 입어서 그 시대, 문화, 사람과 소통하여 그 시대가 끊임없이 개인과 자기 시대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성경과 자신학화

자신학화는 자기 신학화가 아니다. 자신학화의 경계는 계시다. 계시가 갖고 있는 초월성과 내재성을 모두 담고 있는 성경이다. 성경을 대할 때의 내재성의 타락인 성경주의와 초월성의 타락인 영해의 오류를 극복하려는 시도가 필요하고, 이것은 대화로서의 성경해석과 의심의 해석학과 신비의 해석학을 추구한다.

-일반계시(이콘)와 자신학화

물성을 가진 인간임을 인정하고 이콘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풍부함에 주목하되

이콘이 갖는 익숙함이 주는 유익과 위험, 이야기와 의미를 상실한 이콘의 낯설음(갓쓴 예수의 낯설음)이 주는 유익과 위험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진정한 이콘인 인간, 공동체의 타락-인간의 신격화, 공동체의 신격화-이 가져온 우상화를 경계하는 일이 자신학화의 시작이다. 사랑의 공동체인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인간성의 회복이 이콘의 완성이다.

-신비와 자신학화

부정신학, 과정신학이 말하는 어떤 이콘으로도 다 담을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나 자신학은 내가 만난 하나님, 예수님에 대한 고백들 자신학의 중요성은 주류신학의 폭력성을 감안할 때 중요하다.

자신학화는 하나님의 임재의 신학이고, 스스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의 신학이고, 그것에 대해 우리가 수용해가는 여정으로서의 신학이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정의해가는 여정이다. 하지만 그 정의가 하나님을 파악하고 장악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해야 하며, 그렇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정의를 상대화하도록 우상파괴 작업을 진행하신다. 결국 자신학화는 늘 신비의 여지가 있는 신학이어야 한다(신비주의의 오류 경계). 우상파괴를 하는 방식은 그 사람의 실존의 자리, 삶의 자리, 존재의 자리, 일상의 자리를 위협하는 하나님의 간섭이다. 그것을 잘 수용하여 인과율을 깨뜨리고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이 자신학’()의 과정일 것이다.

-자신학화의 필연성-자신학화는 예수화이다!

제자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고, 그분을 배우는 사람이고, 그분에게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분의 사람이 되고, 그분을 위한 사람이 되고, 결국 그분과 같이 되는 것이다. 자신학화는 그분처럼 되어 가는 과정이며, 따라서 자신학화가 없는 제자는 그분의 뒤를 따를 수 없다.

잣대가 없는 줏대는 우상을 만드는 일이 되기에, 잣대를 형성해 가는 노력과 그 잣대를 상대화 하는 과정이 있을 때 그분의 일에 참여할 수 있고, 그분의 왕권을 긍정할 수 있다.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누구든 자신학화는 진행하고 있다. 모든 성도는 신학자다. 다만 바르게 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 또 올바른 준거틀(성경, 그리스도, 복음)을 가지고 하고 있는지, 누구를 위하여 무엇을 위하여 하는지, 어떤 태도(열림, 경청, 겸손, 인티그러티)로 하는지, 얼마나 더 깊고 넓게 하고 있는지가 다를 뿐이다.

목회(牧會)는 성도들이 자신학화하여 자신만의 예수전()을 쓰도록 격려하고, 그것을 가지고 서로 상호작용하며 관계를 맺도록 디자인하고, 그들의 수준과 처지에 맞게 성령께서 역사하시도록 성경을 잘 가르치고 기다리는 일일 것이다.